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사히 신문 (문단 편집) == 역사 == 아사히 신문은 1879년 1월 25일 오사카에서 기무라 노보루(木村騰)가 창간했다. 1888년에 메사마시 신문을 매입하여 도쿄에 진출, 이후 '도쿄 아사히신문'으로 개칭, 발간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이듬해 오사카의 아사히신문은 '오사카 아사히신문'으로 개제된다. 때문에 어떻게 보면 요미우리 신문이 [[도쿄]]에서 창간해 [[간토]] 지방을 대표하는 신문이라고 한다면 아사히 신문은 [[오사카]]에서 창간된 [[간사이|긴키]] 지방을 대표하는 신문이라 볼 여지도 있었지만, 세월이 한창 흐른 지금에 와선 둘 다 전국지라 딱히 의미없는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엔 오히려 전쟁을 독려하고 찬양했던 [[흑역사]]가 있다. 그러다 전쟁이 패전으로 끝나자마자 논조가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어 비판받기도 했다. 물론 이는 당시 [[군국주의]]에 대해 해당 신문에서 비판을 하면 군부(혹은 정부)에서 바로 폐간 조치를 내렸던 시절이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은 있었다. 이는 1905~1925년까지 아사히가 주도하기도 했던 [[다이쇼 데모크라시]] 이후 이를 못마땅하게 본 군부와 우익 세력이 국민들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 만든 [[치안유지법]]의 효과가 매우 컸다. 심지어 1936년 [[2.26 사건]] 때는 아사히 신문사가 쿠데타군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사실 한국 언론도 독재정권 시절에는 비슷하게 답습한 현상이기도 하다. 또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조선일보/역사#s-4.1.2|조선일보는 6.25 전쟁 시기 김일성 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2020년 [[슈칸분슌]]이 보도한 쿠로카와 히로무(黒川弘務) 도쿄 고등검찰청 검사장의 마작 내기 스캔들에 아사히신문 기자도 끼어있어서 정직 1개월을 받았다.[[https://www.asahi.com/sp/articles/ASN5Y4WBLN5YULZU00M.html|#]] 재미있는 건 산케이 신문은 자사 기자가 걸렸음에도 처분을 최대한 미루며 스캔들이 지나가길 바라는 눈치였으나, 아사히는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사과도 하고 처분 조치도 신속하게 내렸다는 것. 아베 정권에 카운터펀치를 날릴 수 있는 사안이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2021년, 재정난에 시달리자 구독료를 올리기로 결정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1&oid=001&aid=0012451288|#]] 사실 전세계적으로 신문 사업 자체가 사장세긴 하지만[* 이미 [[산케이 신문]]은 2020년 전국 간판망을 포기하면서 전국지에서 밀려났다.] 2020년 적자를 낸게 주요한 원인으로 보인다. 근데 2019년은 또 흑자였던거 보면 등락은 있는듯.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